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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플러, 목사가 되려했던 위대한 천문학자(조덕영 박사)
    카테고리 없음 2020. 3. 8.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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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플러, 목사가 되려는 위대한 천문학자, 지구와 화성 같은 태양계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 행성이 태양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행성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 가운데 하나다. 뛰어난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자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은 요한 케플러(Johann Kepler:한개 57하나 하나 630)은 지나친가?베하과 지방의 데당이 가난한 소가족에서 태어났다. 본래 중세의 기사 중에는 케플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귀족과 기업인도 많았다. 병약한 어린 아이 케플러의 할아버지 세발드 케플러는 사업에 성공한 베하나의 쉬바리아라는 마을 시장이었지만 요한 케플러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이미 집안 형편이 기울어져 있었다. 케플러는 조산아로 태어났을 정도로 아내 sound로부터 매우 약한 아이였다. 그는 고열과 위장병으로 종기와 나쁜 시력 때문에 전했고, 천연두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여러 병으로 끊이지 않는 고통에 전했다. 그의 집은 할아버지 시절부터 매우 철저한 개신교 신앙을 가진 가계였지만, 바로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대부분이 가톨릭 사회였던 것에 비해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이런 기독교 신앙은 연약하고 어린 케플러를 떠받치는 버팀목이 되어 위대한 천문학자가 된 후일까지 그의 삶을 이끌어갈 등불이었다. 하나 577년 어느 날 그의 어머니는 하항산에 큰 빛을 뿌리는 매우 혜성(혜성)를 어린 케플러에 보였다. 이리하여 3년 후, 그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가는 달이 지구 그림자에 숨은 월식(월식)을 보인다. 이처럼 어린 시절 하나 찍기에서 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케플러는 결국 그것이 천체에 대한 일생의 관념이 되고 말았다. 루터파 출신 목사가 되려던 아이 케플러의 작은 루터교 집단에 속한 가족 덕분에 어릴 때부터 독실한 신앙에 익숙해진 케플러는 라틴어학교를 졸업한 뒤 개신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열 세살 되던 해, 경쟁이 데당이 치열한 시험에 합격한 그는 그 후 3년간 반복되는 질병과 어려운 학업 이리하여 가난하게 전 달리면서도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며 학업에 정진했다. 하나 589년 가을, 케플러는 지나친가?투 이빙겡 대학에 입학하게 되지만 이 대학은 바로 당시 기독교 루터파 신학 연구의 유명한 중심지로 과감하고 사색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다. 그는 이곳에서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신학 공부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케플러는 늘 그렇듯 그를 따라다니는 두통과 발진이 생겨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열병에 전달했다. 그때마다 그는 신앙심 깊은 기도로 버티며 학업을 계속해 마침내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천문학과의 조우 - 마에스트린과의 만남, 여기서 케플러는 그의 인생에 획기적인 전천을 가져다준 스승을 만나게 된다. 바로 유럽 전역에서 크게 존경받는 수학과 천문학 교수인 미카엘 마에스트린이라는 사람이었다. 바로 당시 마에 쿠스 교수는 지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하나 473하나 543)의 이론을 가르쳤지만 바로 당시로서는 데당이 어려운 이 이론을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몇몇의 유능한 학생들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젊은 케플러는 그의 설명에 매혹돼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그가 관념을 갖고 있던 천체와 별의 운행에 관한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이처럼 케플러는 과학 공부와 목회를 위한 신학을 잠시 병행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 공부는 하나 594년 초 천주교의 영향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의 한 신학교에 수학 교사로 부표며 중단되게 된다. 그는 그곳 스티리아에 있는 그라츠대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지방의 수학자(하나의 지방자치측량사)와 달력, 연감의 제작자로도 하나가 된다. 마침 당시 점성달력은 달의 위상과 냉정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날씨와 수확 시기, 정부의 운명과 전쟁의 승패까지도 알려줘야 했습니다. 천문학에는 그다지 경원하지 않았던 당시의 귀족들도 점성술에는 깊은 경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달력을 다루는 사람은 바로 당시 매우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케플러가 바로 그 분야 전문가였던 셈이죠. 농민 봉기, 터키인의 침공, 이리하여 유례없이 만약 힘든 겨울의 추위 등 하나 595년에 대한 케플러의 예측은 확실히 맞았다. 케플러는 이때 처음의 저서 『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하나 596)을 낸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에 대한 소견과 기독교와 피타고라스적 종교성의 융합을 시도한 책이었다. 케플러가 아직 학문적으로 미숙할 때 나온 천문학서였던 sound를 알 수 있다. 이 바로 당시 케플러는 7살 나이가 많은 위대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에 이 책을 선물하고 갈릴레오는 감사의 편지에 감동적인 우정을 나누던 흔적(하나 597년 8월, 케플러의 책을 받아 갈릴레이가 적어 준 편지 글이 남아 있다.이후 5년 본의 아니게 케플러는 천체 관측이(하나인 점성술사)로 귀족들로부터 귀중한 대우(?)를 받게 됐다. 그러나 천문학자입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는 당연히 점성술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케플러는 점성술사라는 명칭을 달갑지 않게 여겼는데 귀족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는 천문학자로서 당시 천체의 움직임이 지구상의 문재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성경은 "하상 광명이 징후와 사시와 화택의 연한을 이룬다"고 하셨지 않은가. 이는 변질된 점성술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은 단순히 전문가로서의 천문학적인 자료와 주변 정황 분석을 통한 통찰력이 맞아떨어진 것뿐이었다. 정이 스토리 오히려 케플러는 점성술을 감춘다선천적으로 고귀하고 합리적인 모태인 천문학에서 태어난 어리석은 처녀와 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이 모든 것들은 가난한 그가 살아가기 위한 작은 수단이었다. 달력 제작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생활인으로서의 역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케플러는 좀 더 괜찮아의 학문적 성숙과 진전을 이루는 계기를 맞게 된다. 바로 당시 합스부르크의 수도 프라하에서 루돌프 2세의 궁정 수학자에서 하려고 했던 티코 브라헤와 만남이었다.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만남 하나 600년 케플러는 덴마크의 유명한 기독교인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Tycho Brahe, 하나 546·하나 60개)과 만나고 본격적인 천문학자로서의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하나 599년 바로 그때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개신교도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케플러도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에서 추방돼 곤경에 빠졌는데, 이때 브라헤를 만났습니다. 브라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별이 하항상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여 전천한다는 것을 알고 여러 개의 새로운 별을 발견하기도 했던 바로 당시의 위대한 천문학자였다. 그러나 브라헤도 물론 시대적 한계를 지닌 과학자였다. 브라헤는 모든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다시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최근의 천문학 지식으로 볼 때, 바로 당시에 매우 세련된 이론이었다. 브랏헤과 케플러는 천문학에 관한 생각에서 다른 점이 많았다 함께 한 기간이 하나 0개월이 안 됐는데 브라헤에 대한 케플러의 존경심은 브라헤가 죽은 뒤까지도 요지부동이었다. 신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나와 브라헤를 맺어주시고, 힘든 시련 속에서도 내게 끊이지 않게 해주셨다."브라헤는 이다죠은하고 30세의 청년 과학자가 대장부의 천문학적 자료를 모두 내놓고 괜찮은 이 연구하고 온 꽃을 완성하고 주도록 요청한다. 부라헤가 이다종하자 덴마크 국왕 루돌프 황제는 케플러를 부라헤의 후이다인 황제의 수학담당관으로 이다명했는데, 이는 케플러의 연구에 결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케플러의 '케플러의 법칙' 발견 화성에 대한 브라헤의 때마침 관측자료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케플러는 마침내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을 완성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케플러는 화성, 즉 마르스(Mars)와 벌인 개인적인 싸움의 승리라고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화성이라는 뜻인 마르스가 바로 로마의 군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유머러스하게 이 스토리인 것이다. 화성에 대한 관측에서 그는 행성의 궤도는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역시 확충 하나의 중심을 가진 타원형의 궤도입니다라는 케플러의 제 1법칙을 완성했다. 동시에 "태양을 초점에 하나의 행성의 움직이는 같은 시기에 동의한 면적 궤도를 그린다"은 케플러의 제2법칙도 발견했다. 이는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행성의 속도가 빨라지고 태양에서 멀어지는 지상행성의 속도는 느려진다는 아주 중요한 법칙이었다.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충실하고 구체적인 천체 관측도 없는 한개 7세기 초에 발견했다는 것은 케플러가 데당이, 치밀하고 수학에 데당이 뛰어난 천재 그와학쟈욧 sound를 웅변하고 있다. 이 법칙은 하나 609년 케플러의 저서 『 세로프게 천문학(Astronomia nova)』을 통해서 보도됐다. 케플러의 치밀함은 이제 그가 하나 604년 천문학과 무관한 눈망울을 통해서 눈 속으로 들어온 빛이 수정체에 의해서 끌고 망막에 거꾸로 된 상을 맺는 망막상(retinal image)이론을 발표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3법칙도 발견했다. 이 법칙은 지구의 한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어느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행성의 공전 궤도의 평균 반경 3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칙은 하나 6개 9년 그의 마지막 저서 『 우주의 조화(De harmonice mundi)』를 낼 때에 맞추어 발견됐다. 어린 이작 뉴ー통(하나 642하나 727)은 그의 유명한 만유 인력의 법칙을 영국 왕립 협회에 제출하면서"케플러가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대한 수학적 증명"이라고 괜찮의 법칙을 소개하고 있다. 뉴턴은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중력의 법칙을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케플러는 결국 당시 과학계를 뒤흔들던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수용하고 처음에 그것을 수학적으로 소상히 밝힌 위대한 천문학자였다. 케플러의 신앙이 위대한 천문학자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느님의 섭리가 저와 다같이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우연히 제가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이 스토리인 것이 참이라면 내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케플러는 그의 책 우주의 신비에서 고백했다. 역시 케플러는 천체의 운행에 대한 위대한 법칙을 발견한 뒤 은사인 마에스트린 교수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자연이라는 책에서 인정받고 싶은 신을 위해 나는 내가 발견한 이 사실을 발표하려고 한다. 저는 한때 신학자가 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문학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하항.씨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한 근 짱 이 그 손에 했다 하나 서울 나타내는 길이다"(시편 한 9:하나. 시편의 이 스토리는 케플러 천문학 연구에 있어서 하나센의 중심 사상이었다. 그는 항상 눈에 띄는 질서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질서가 창조주의 신이 내린 질서임은 물론입니다. 그는 역시 천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성경 누가복 sound에 나타난 예수님의 탄생 연대에 대한 문재에도 노력을 기울였고,, 히브리와 파벨롱 이리하여 로마와 헬라의 달력을 연구한 끝에 라틴 달력에 잘못이 있는 sound를 밝히고 신이 실제로는 희망 앞 4년 탄셍 하욧 sound를 주장했습니다. 이는 결국 누가복 sound의 기록이 정확함을 주장하는 논문이었다. 예수 탄생 연대 문재는 현재도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전 4년경 탄생했다는 것이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정설로 꼽힌다. 하나 6개 8년 케플러는 "우주의 조화"이라는 논문을 완성했지만 이것을 그는 "신성한 설교이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는 찬송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오하느님!" "나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소견을 한다"고 말한 유명한 이 스토리는 그 후 최근까지 신을 믿는 많은 과학자들의 신앙고백이다. 아마 최초의 과학 소설의 1개인 "달의 문"이라는 과학 소설을 쓰기도 했다 케플러는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우리 천문학자는 우리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도록 허락된 지극히 큰 신의 종뿐이다."이것도 그의 유명한 신앙 고백 1개였다. 병약한 학자로서 끊임없이 개인적인 불행과 빈곤을 겪으면서도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론 이런 성상은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케플러가 이 다종을 앞두고 한 사람이 그에게 구원은 무엇에서 오느냐고 묻자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예수를 위해 봉사하는 오직 그것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캘거리대 역사철학교수인 오슬로(M. Osler)는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라는 케플러의 주장은 신의 섭리에 대한 루터교의 신학 개념이 기본적인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 위대한 천문학자는 진정한 괜찮아의 피난처와 위안을 찾았다. 하나 630년의 하나하나 달 하나 5개, 겨우 요한 케플러는 영원한 천국에 갔다. 레겐스부르크 성벽 외곽의 성베드로 교회에 있는 그의 작은 묘비에는 그가 이종이 되기 몇 달 전 자신이 쓴 비문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천체를 측량하곤 했어, 나는 지상의 그림자를 측량하려고 해. 우리 영혼은 하상에서 왔지만 우리 육체의 그림자는 여기 누워 있다.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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